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정묵재(靜默齋)

안동권씨 충재손 권술(정묵당)(安東權氏 冲齋孫權述(靜默堂))

28.5x57.8x3.7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정묵재(靜默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28.5x57.8x3.7
  • 건물명 정묵재(靜默齋)
  • 공간명 안동권씨 충재손 권술(정묵당)(安東權氏 冲齋孫權述(靜默堂))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
  •  
r0101_1.jpg
정묵재(靜默齋)

정묵재(靜默齋)


정묵재(靜默齋)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정묵당에서 보관해온 것으로, 정묵당(靜默堂) 권술(權蒁, 1688~1726)의 당호 편액인 듯하다. ‘정묵’은 조용히 침묵한다는 말로, 『초사楚辭』, 「구장 석송九章 惜誦」에 “물러나 조용히 있으면 나를 알아주는 이 없고, 나아가 외쳐도 내말 듣는 이 없구나. [退靜默而莫余知兮 進號呼又莫吾聞]”라고 한데서 취한 말이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숨이 막힐 듯 치밀하다. 자로 잰 듯한 짜임새, 사전 설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고요함(靜)과 침묵(黙)이란 글귀의 의미를 새겨보면 편액 속의 글씨가 그 자체로 침묵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외쳐도 더 이상 들어주는 이 없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강한 외침이다. 이보다 더한 언어가 있을까? 

(서예가 恒白 박덕준)

안동권씨 충재손 권술(정묵당)(安東權氏 冲齋孫權述(靜默堂)) 소개


권술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술부(述夫), 호는 정묵재(靜黙齋)이다.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의 6대손으로 조부는 권탁(權霦濯), 아버지는 수와(睡窩) 권두망(權斗望, 1658~1714)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 박시삼(朴施三)의 딸이다. 강좌(江左) 권만(權萬)의 족형으로 역대 비장(碑狀), 기설(記說), 소장(疏章) 가운데 세교와 관계되는 좋은 말과 훌륭한 행적을 가려 뽑아 『계고편稽古篇』 8책을 편찬하였다. 권술에 대한 인적 정보는 『안동권씨대동보』 이외에는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자세한 소개는 불가능하다. 다만 권술은 진성이씨(眞城李氏) 난은(懶隱) 이동표(李東標)의 아들인 두릉(杜陵) 이제겸(李濟兼, 1683∼1742)과 처남 매부 간이 된다. 이제겸의 문집인 『두릉집杜陵集』에 이제겸이 매부 권술의 죽음에 대해 지은 제문이 실려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강철처럼 굳고 옥같이 맑은 자질을 타고나 크게 될 인물로 기대하였고 과묵함으로 성정을 기르고 담담하고 고요하게 자신을 지켜 학업이 일취월장하여 영남에서 우뚝한 군자가 될 기약이 있었는데 이렇게 죽게 되어 안타깝도다. 평소 성품이 굳세고 사나웠으나 남들과 함께 있을 때는 치우진 성격을 바로잡아 완전 다른 사람처럼 하였다. 대부분 학문의 연원이 있는데, 자네는 남에게 수업한 것도 없이 능히 그 지름길을 이해하여 최정상의 위치까지 오른 것은 타고난 자질이 높아서이다. 일찍이 내가 자네에게 농담으로 ‘자네의 경개(耿介)함은 백이(伯夷)와 같고 나의 온화함은 유하혜(柳下惠)에게 배웠다’라고 하니 자네가 크게 웃으면서 ‘지극히 맞는 말이다’라고 하였었네. 내 누이동생이 자네의 아내가 되었건만 이제 자네가 죽어 의지할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내가 자네의 집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네.”라고 하였다.

권술은 안동권씨 복야공(僕射公)의 후손으로 충재 권벌의 6대손이고,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이나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모두 그에게 7촌숙이 된다. 안동권씨가 봉화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권사빈(權士彬)의 둘째 아들 권벌이 외조부 윤당(尹塘)이 살던 봉화 닭실[酉谷]로 옮겨 살면서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권사빈의 맏아들 권의(權檥, 1475~1558)가 안동 도촌에서 예천 작은맛질로 옮겨 갔고 셋째 아들 권예(權欚)도 닭실에 자리를 잡았으나 현재 후손이 남아 있지 않고, 넷째 아들 권장(權檣)은 맛질에 정착하여 살았으나 후손들은 전라도로 이주하였다.

안동권씨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족보들 중 가장 오래된 『성화보成化譜』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안동권씨의 자랑이자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성화보』의 서문에서는 안동권씨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태사(太師) 행(幸)이 인행(仁行)을 낳으니 벼슬이 낭중(郞中)에 이르렀고, 인행이 책(冊)을 낳았는데 책이 스스로 본읍(本邑)의 향리가 되었다. 권씨는 책이 향리로 된 후로부터 7대가 미약하여 떨치지 못하다가 수평(守平·樞密公)에 이르러 부흥하고 자손이 미덕을 계승하여 문정공(文正公·菊齋)에 이르러서 비로소 크게 현달하였으며, 수홍(守洪·僕射公)의 후손 문탄공(文坦公·一齋)이 또다시 현달하여 권씨가 드디어 2대족으로 나뉘어진다.”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3대 권책(權冊)의 시기로부터 10대 때까지 안동권씨는 안동에 세거하며 대대로 향리직을 세습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향리로 정착한 안동권씨는 10대에 이르면 15파로 나누어지며 향리직에서 벗어나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들을 배출하였다. 안동권씨 15개 파는 복잡한 양상을 띠므로 명확하게 정리하여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보감寶鑑』에 보이는 「안동권씨 10세 15파 세계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9대 권백시(權伯時)의 장자 권수중(權守中)이 종파(宗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차자 권시중(權時中)이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아우인 권중시(權仲時)의 장자 권수평(權守平)이 추밀공파(樞密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아우인 권중시(權仲時)의 차자 권수홍(權守洪)이 복야공파(僕射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둘째 아우인 권취의(權就宜)의 아들 권태달(權棣達)이 동정공파(同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셋째 아우인 권통(權通)의 장자 권지정(權至正)이 좌윤공파(佐尹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넷째 아우인 권통의 차자 권영정(權英正)이 별장공파(別將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다섯째 아우인 권취정(權就正)의 아들 권통의(權通義)가 부정공파(副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여섯째 아우 권융(權融)의 아들 권인가(權仁可)가 시중공파(侍中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權冊)의 둘째 아들인 권광한(權光漢)의 장자 권굉옥(權宏玉)의 후손이 10대 권숙원(權叔元)에 이르러 중윤공파(中允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둘째 아들인 권광한의 차자 권굉진(權宏眞)의 후손이 10대 권사발(權思拔)에 이르러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셋째 아들인 권겸한(權謙漢)의 후손이 10대 권대의(權大宜)에 이르러 광석파(廣石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셋째 아들인 권겸한의 후손이며 8대 권입평(權立平)의 둘째 아들 권의정(權宜正)의 아들 권추(權樞)가 호장공파(戶長公派)를 형성한다. 2대 권인행(權仁幸)의 둘째 아들 권륜(權綸)의 후손이 10대 권척(權倜)에 이르러 검교공파(檢校公派)를 형성한다. 7대 권렴(權廉)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들의 후손이 10대 권형윤(權衡允)에 이르러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를 형성한다.

참고문헌
  • 「이소」, 『초사』
  • 이제겸, 『두릉집』
  • 『안동권씨대동세보』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